지나치게 착하다고 듣는 사람들은 내 욕구보다는 타인의 욕구에 시선을 돌립니다. 상대방의 평가에 따라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많은 염려를 합니다. 착하다고 듣기 때문에 직장생활도 잘하고, 대인관계에가 겉으로 보기에는 원만하다. 선한 이미지로 타인을 잘 맞춰주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위사람들이 그들에게 기대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욕구에 귀 기울일 경우 타인이 어떤 소리를 하는지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기때문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는 편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아닌 상대의 마음에 맞추려고 하다보니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말하지 못하다보니 상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커져만 갑니다. 자신의 좌절된 감정은 쌓이다보지 갑자기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착하다 듣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소리와 타인의 소리에 균형을 맞추는 삶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법학과 교수이면서 기독교인인 김두식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나온 글들이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분이 영화 색계를 본 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근본주의 기독교 계의 세계에서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왔으나, 이젠 정직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하네요.
너무 착한 당신은 자신의 목소리는 듣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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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모방욕망은 전염병과 같아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동일한 욕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일단 동일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 욕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앞사람의 욕망을 따라 전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선명하면서 동시에 그를 미워합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다 못해 빼앗고 싶다는 욕망을 갖습니다. 방해물이 있으면 이 욕망은 더욱 강회됩니다. 경쟁자가 있으면 욕망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욕망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모방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모방을 강화합니다. 무제한의 야망과 과도한 경쟁은 사회를 파괴합니다.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내면의 힘 같은 거죠. 앞서 말씀드린 '궁합'도 아마 이런 에너지 사이의 일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겁니다. '헤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 다는 것은 상대방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용기 또는 에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칙은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일탈하는 아저씨와 사냥꾼이 된 아저씨는 정반대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일란성쌍둥이입니다. 성장과정도 똑같아서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욕망을 배출하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이지요. 그런데도 사냥꾼이 된 아저씨들은 마치 정의를 독점한 것처럼 검사와 기자의 바로 뒷자리에 서서 희생양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계'의 사람들이지만, 숨겨진 '색'의 농도만큼 더 맹렬하게 돌을 던진다는 점에서 사실은 '색'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한 귀퉁이에 약간의 여유공간을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모방욕망과 무한경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게 우리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잠깐 산소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꼽아봐야 열 손가락을 채우기도 어렵습니다.
그 차가운 진실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이같은 차가운 진실의 인정은 욕망의 인정만큼이나
소중한 정신승리의 출발점입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정직한 사람, 손을 뻗어 원하는 것을 붙잡고 거기서 행복을 얻은 자유로운 사람,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큰 기쁨이었습니다
2박 3일의 강연에서 고메즈 목사는 외부에 비치기를 원하는 '이미지'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진짜 자신'(real self)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진짜 자신'을 찾는 기준은 주로 '마음'이었습니다.
남의 말이나 판단이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지,
내 마음은 어떤 것에 흔들리는지,
나를 긴장시키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다보면 진짜 자신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메즈 목사에게 신앙(faith)은 '무엇을 믿느냐'는 믿음(belief)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누구냐'는 존재(being)의 문제였습니다.
고메즈 목사가 말하는 자기 존재의 핵심에는 게이, 신학자, 공화당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의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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