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여전히 나를 잡고 있을 때
미호는 가끔씩 찾아오는 회식 시간 술자리가 고역이다. 특히 술 마시는 자리에서 남자들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격렬한 감정이 올라왔다. 과거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엄마를 때렸던 장면, 어린 자신은 잠자코 숨을 죽이고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와 늘 데면데면했던 게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실직 후 방황했고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져 매일 집에서 술만 마셨다. 엄마는 아빠가 술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이니 어디 가서도 집안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미호는 가족의 비밀을 묻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지키기로 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면서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패턴을 사용함으로써 정서적 에너지를 차단했던 것이다.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정서적 반응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고통스러웠던 일을 이야기하고 나니 처음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회식자리가 전보다 힘들지 않았다. 삶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면 무엇이 힘든지 이야기하고 묶인 실타래를 푸는 작업이 필요하다. 두렵다고 피하려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특히 어린 시절 어쩔 수 없었던 무기력한 순간에 겪은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불안을 다루는 방어기제
프로이트는 정신역동 이론을 말하며 우리가 내적 긴장과 불안을 다루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했다. 즉, 너무나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억압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생애 초기에 시작되므로 과거 억눌렀던 갈등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상담을 하면서 닫힌 기억들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불쾌한 생각은 억누르고 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내담자들은 상담하면서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올라오면 고통스럽고 힘들어한다. 불안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성과 관련된 피해 기억, 부모에게서 받았던 학대의 기억은 믿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진실을 보게 되었지만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때로는 불안으로 인해 상담을 급히 종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두려움은 피하고 보지 않으려고 할수록 점점 더 깊이 파고든다. 그렇기에 숨지 말고 만나야 한다.
내면의 어둠을 만나다
영화 〈검은 사제들〉 포스터의 제목은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이다. 이 말처럼 내면으로 깊이 내려 들어가는 작업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공포영화는 생각지 못한 뭔가가 등장하고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신학생 최 부제는 악귀로 힘들어하는 어린 소녀에게 구마 의식을 행하다 도망친다. 어린 시절 큰 개에게 동생이 물려 죽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를 제대로 묶지 않은 개 주인에게 잘못이 있었지만 최 부제는 동생만 두고 도망쳤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도 소녀를 두고 도망친 그는 어두운 세계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심리상담센터에서 심리상담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더 이상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문제 증상이 해결되면 상담을 그만두곤 한다. 깊숙이 숨어 있는 내면을 직시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최 부제는 결국 두려운 내면을 마주하고 어린 시절의 누이를 만난다. 누이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최 부제처럼 어린 시절에 멈춰 있다. 묶여 있는 말, 힘든 기억을 갖고 사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피하고 피해도 그때의 일이 자신을 얽매고 있다면 만나야 한다. 피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솔직하게 원망할 수도 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정서를 억누르며 참느라 에너지를 쓰고 있다면 불안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최 부제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야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명동의 후미진 골방으로 돌아왔다. 과거 죽은 누이가 아닌 지금 악령에 시달리는 소녀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아픔을 직시하면서 비로소 그는 성장했고 소녀를 도와줄 수 있었다.
과거에 머무르느라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신뢰할 만한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힘들었던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혼자 고립되었다면 우선 일기장에 써보는 것도 방법이다.
영화에서는 신부가 악령의 이름을 계속해서 물어본다.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두려움을 만날 용기를 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눈물이 강처럼 흐르고 악몽에 시달릴지라도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 안의 고통받는 아이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진짜 나로 살기 위한 용기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용기를 갖는다면 어두운 내면의 두려움을 분명 쫓아낼 수 있다.
저서 <나를 사랑하는 일에 서툰 당신에게> 중에서 (북라이프 출판사, 안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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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현, 2019
마음달 심리상담센터 소장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1급 703호
한국임상심리학회 임상심리전문가 12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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